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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金炳淵, 1807년(순조 7년) ~ 1863년(철종 14년) 3월 25일)은 조선 시대 후기의 풍자 시인이자 방랑 시인이다.

그는 흔히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생과 배경

속칭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병연 그는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字)는 성심(性深), 호(號)는 이명(怡溟), 지상(芝祥), 난고(蘭皐)이다. 그의 선대 조상을 살펴보면 9대조부는 병자호란 때 척화대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형으로서 형조참판을 지낸 김상준이며 5대조는 황해도 병마절도사 김시태, 고조부는 전의현감 김관행, 증조부는 경원부사 김이환이다.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다가 레지스탕스로 투항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 장원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으로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그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

생애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 가문인 김안근(金安根)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조부(祖父)이자 선천부사(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은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

김익순은 함흥 중군(中軍:정3품)으로 있다가 선천부사 겸 방어사로 전관되어 온지 불과 서너달이 지난 상태였다.

신임지에 와서 어수선한 일을 정돈한 후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수일간 잔치를 열었는데 새벽에 반란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있는 방어사(防禦使) 김익순을 결박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으나 그 가족은 살려주기로 하였고 김삿갓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후 가문에서 종 노릇을 하던 이(김성수)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4형제를 키워내었다.
그 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 뒤에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응시했을 때,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에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 급제한 것이었다.

뒤에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유랑 도중 집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할아버지 김익순하고의 관계

당시 20세가 되었을 때까지 김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김익순이 적장 앞에 무릎 꿇은 대가로 역적으로 몰린 사실을 아들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온 어머니 때문이었다.

또한 아들들마저 역적의 손자로 낙인이 찍히면 조정과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비난 등은 물론 목숨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있기에 일부러 할아버지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이었다.

때문에 병연은 자신의 할아버지 익순이 사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결국 영월 백일장 때 시제에 김익순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그가 자신의 가족과 아무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를 싸잡아 비판하는 답글을 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야 어머니의 해명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결국 이로 인한 자괴감에 빠져 허심탄회하다가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는 삿갓을 쓰고 방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방랑의 시작

그가 본격적으로 전국 방랑길을 떠난 것은 20세 때 어머니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해명한 후부터였으며 방랑 중이던 29세 때는 가련(嘉蓮)이라는 기녀와 동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방랑길을 떠나기 전에 갓을 파는 집으로 가서 크기가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집에서 긴 지팡이와 동국여지승람 등 지도책 등을 소지하고 떠났다는 일설이 있다.

그에게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외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어머니와 처(妻)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사실상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한때 잠시 집을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사실상 가족들과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사망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한때 그의 둘째 아들 김익균이 3차례 정도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남도 화순에 들렀던 중 1863년(철종 14년) 안 참봉의 사랑방에서 죽었는데 아들 김익균이 부고(訃告)를 듣고 화순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운구하여 안장되었다.

김병연의 시신이 묻힌곳은 훗날 지금의 김삿갓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