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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의 이순신’ ‘조선의 조자룡’으로 불린 충의공 정기룡 장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기룡 장군은 당시 명나라 장수 마귀가 이순신, 한명련, 권율과더불어 인정한 조선 최고 장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0년 전인 1562년4월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마을에서 태어난 정 장군은 1580년 고성 향시에 합격,25세인 1586년에는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으로 기룡(起龍)을 하사 받았다. 정기룡 장군은 임란 7년간 60전 전승이라는 경이적인 전공을 올렸다. 기병 수 십기로왜군 500명을 무찌르고, 조명연합군이 참패한 것으로 유명한 용인전투에서 경상도 병력 중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군관도 바로 그였다. 하지만 정기룡 장군은이순신 장군만큼 대중적이지 못하다. 진즉 기렸어야 할 장군의 기념사업회도 지난 1일 오전 하동군 섬진강포구식당 물꽃정원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출범했다. ‘역사가 잊어버린 불패의 장군’이라는 역설은 정기룡 장군이라는 인물의 슬픈 딜레마다.

역사가 잊은 장군이 아닌, 역사가 잊지 않은 불패의 장군으로 그가 남을 수 있도록 부디 이 연재가 후세들 마음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으면 한다

“역사가 잊어버린 불패의 장군”

起龍無則 嶺南無 (기룡무즉 영남무)

嶺南無則 我國無 (영남무즉 아국무)

“정기룡 장군이 없었다면 영남이 없었을 것이고 영남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정기룡 장군에 대한 당시 조정의 평가였다. 정기룡 장군에 대해 흔히들 말한다. “육지의 이순신” “임란의 맹호” “60전60승의 명장” “역사가 잊어버린불패의장군”. 정기룡 장군 과연 그는 누구일까?

정기룡 장군은 1562년4월24일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0년 전 하늘이 장군을 내렸다. 태어날 때 아기울음소리가우렁차 집안이 쩌렁쩌렁 울렸으며, 집과 대밭에 서기가 어리었다 한다.

17세 때 진주 남강 근처로 이사하였고, 20세 때인 1581년 경상도 상주(尙州)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1585년 24세에 진주 향리인 강세정의 딸과 혼인하고,이듬해1586년10월 25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 하였다. 이때 선조의 명으로 무수(茂樹)란 이름을 기룡(起龍)으로 개명하게 된다.

36세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

정기룡 장군은 31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거창, 상주, 고령, 합천 등지에서 활약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1617년 36세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승진하여경주성, 울산성 등을 수복하였고 이후 진주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명나라의 총병직(摠兵職)을 제수 받기도 하였다. 같은해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정 장군은 5년 뒤인 1622년2월28일 통영의 통제영에서 순직하였다. 경북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안장하였으며, 장군을 기리기위해상주에는 충의사가, 하동에서는 경충사를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극복의 일등공신 책봉

그는 임진왜란 당시 육지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장군이었다. 1592년4월23일 경상우도방어사 조경 휘하 별장으로 거창군 신창(현 거창군 응양면 노현리에서일본군 제3진 구로다나가마사의 선봉 500명과 조우한다.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장군의 기마돌진 공격으로 왜병 100여명을 살해하고 적을 물리쳤다. 이최초의승리가 전국에 알려지자 온 나라가 환호하였고 우리도 싸워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그는 상주대첩도 승리로 이끌었다. 1592년11월21일왜적제1군 고니시유키나가(소서행장 小西行長)의 병참기지로 활용되고 있는 상주지역을 수복하라는 선조의 특명을 접하고 휘하 2000여명 병력으로 상주창과왜적주둔지를 공격한다. 당시 왜적의 수효는 1만5천명이었는데 야간 기습공격으로 이들을 격멸, 사살 인원이 무려 1만2천명에 이른다. 매헌실기 등 기록에는사살한왜적의 왼쪽 귀만 잘랐는데 대략 6수레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로 왜적 코니시유키나가군의 병참선이 차단되어 선조가 몽진한 의주로 진격을 멈추게하였다.정기룡 장군은 임란극복의 일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605년 선조는 도승지 신흠에게 정기룡 장군을 원종선무일등공신(原從宣武一等功臣)에 새롭게 취품하라는 교지를 발표하게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7년만이다.이를 바탕으로 정기룡 장군이 세상을 등진 지 150년이 흐른 1773년 영조가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임란직후 선무일등공신에 취품된 사람은 정기룡장군 외이순신과 권율, 원균 세 사람이었다.

문찬인 하동 향토사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