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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 조선 중기의 여성 예술가이자 한국의 어머니상인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아들이다.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이론에만 몰두하지 않고 현실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한 정치가. 우리나라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이며, 신사임당이 오만원권 지폐의 모델이 되며 모자가 지폐 인물이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본인은 평생 붕당의 대립 해소에 진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정치가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생전에 이이의 서얼 차별 완화 등의 개혁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5]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이이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재 중 하나로 책을 읽을 때 무려 10줄을 1번에 읽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뭐가 대단한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 시대 책들은 일부 서적을 제외하면 전부 한자로 적혀 있던 시절이다. 가독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조선 선비라도 1번에 1줄 읽는 것도 어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사실 이이가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로 인정받는 이유에는 학습 능력이 빼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겨우 23세에 정립해 일관되게 유지했던 이기일원론으로 조선 유학의 사상적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놨던 뛰어난 사상 때문이다.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6살 때 모계 집안인 강릉을 떠나 부계 집안으로 이사했는데 이이 본인의 고향은 강릉이지만 본가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라는 곳에 있었고 이이의 아호인 '율곡'도 파주 '율곡리'에서 본딴 것이다. 가문이 중요시되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고향은 '나 자신'이 아니라 '집안'이 연원을 두고 있는 곳을 의미했는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율곡의 고향은 탄생지인 강릉이 아니라 친가가 위치한 파주가 된다. 다만 실질적인 본거지는 파주가 아닌 강릉인데 왜냐하면 이원수가 신사임당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강릉에는 외할아버지 신명화와 그 윗대로 이어지는 고리가 있고 집안 재산의 절대 다수가 있는 반면에 파주에는 진짜 아무 것도 없는데 유일한 장점은 근기(서울)에서 가깝다는 것뿐이다. 아버지인 이원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이이가 남긴 기록 중 아버지에 관한 별다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실제로 이이와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 때만 해도 가세가 좋지 않아 자기들보다 가세가 강했던 집안의 신사임당과 결혼했는데 신사임당이 엄청난 인물이었던 데다가 아들까지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존재였으니 이원수 본인이 소외감을 느껴서 그랬을 듯하다.

1548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였고 그가 20세 때 성주 목사의 딸인 곡산 노씨와 혼인했다. 20살에 혼인하는 것은 당대로서는 만혼이었는데 한창 결혼해야 할 나이에 어머니 삼년상을 치른 데다 삼년상 이후 불도를 익힌다고 산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했다고 한다. 사실 그가 삭발을 했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기는 했다. 그 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해했다고 전해지는데 머리가 좋은건 유학에서만 작용한게 아니라 불도에서도 작용한 것. 하지만 우연히 유교 서적을 다시 읽은 그는 곧 하산했다. 이 부분은 훗날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는데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천원권에 이황이 쓰고 있는 복건도 이황은 중이 쓰는 두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싫어했을 정도인데 이이가 한때 불교에 심취했으며 법명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비판받아 마땅한 비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이는 성균관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며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면신례 신입 길들이기 도 심하게 당했는지 그는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다만 면신례는 본래 대상을 불문하고 혹독했는데 심지어 정몽주의 증손자도 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치른 면신례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숨졌다. 사대부들이 극진히 모신 정몽주 집안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당시 일반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던 이이에 대한 괴롭힘은 말할 것도 없이 심했을 것이다. 29세 때는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6품 호조정랑으로 등용된 이래 예조와 청요직인 이조좌랑,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쳤고 선조 재위 1년에 명나라에 가는 사신으로서 명나라를 방문하였다.

율곡 이이 묘
구도장원공

가장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 / 진사과(소과) 초시 → 생원과 / 진사과 복시 → 문과(대과) 초시 → 문과 복시 → 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이이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 시험인 별시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 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 고시의 1차, 2차,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이상의 대업적이다. 그런데 응시자인 양반들 입장에선 9번이나 열명 단위로 뽑히는 커트라인이 올라간 셈이다.

실제로 당시 이 부분은 정적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미 합격해서 안 쳐도 되는 시험까지 억지로 중복 응시를 감행하는 행동이 장원이라는 타이틀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이 선생 신도비
붕당 정치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 간의 싸움에서 그는 중립을 지켰다. 서로를 그르다고 주장하며 분열한 사림에게 양쪽 다 옳고 그르다고 하자 사림들이 양시양비론이 어디 있냐고 반발하니, 이에 전국시대 군주들의 전쟁은 다 그른 것이고 주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것이나 백이숙제가 말린 것은 다 옳은 일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년의 이이는 붕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붕당이란 것이 풍문ㆍ명목으로 존재하여도 그들은 모두 군자당이므로 결국 공존하고 화합하지 계파가 나눠 대립한다는 생각부터를 않으려 했다. 붕당의 문제를 인정하여 훈구에게 반격할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언에선 붕당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특히 이이를 한 축으로 지목하기까지 한 이준경을 '말이 사악하다'라고 비난했고, 죽은 이준경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문제는 류성룡 등의 동인이 반대해서 무산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유언으로 말미암은 이 이슈 또한 동서 분당의 무수한 전개 과정 중 하나로 작용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림이 자기들끼리 분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훈구의 정치적 수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고, 실제 역사에서도 붕당의 문제와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 현실을 자각한 이이도 자신의 생각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파의 화합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이때 이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 바로 1575년 (선조 8년)에 있었던 을해당론(乙亥黨論).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며 슬슬 붕당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버린 것.

당대 집권층인 동인은 이이를 맹렬히 규탄했는데,[17] 이는 나중에 이이의 제자들이 성장하여 서인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여 본래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하던 이이가 서인의 종주로 세워지는 모순적인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심의겸의 파벌을 서인이라 부르다가 어느새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을 서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당시 심의겸은 자신의 학파를 형성하기는커녕 이이에게 보호를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붕당을 주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이황, 조식 등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거물급 유학자들의 제자인 신진 사림 동인에게는, 독학으로 학문적 일가를 이룬 이이가 배척의 대상이었던 반면 훈구들에게 우호적이던 기존의 권세가들에게 맞설 만한 거물이 없었던 서인들은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구도장원공의 문제 등 이이의 성격과 행동은 당대 조정의 비난 대상이었다. 29세로 젊은 나이에 한참 명성을 날리던 이이가 이미 합격을 해놓고도 계속 장원 자리를 노리며 불필요한 과거시험에 중복응시까지 감행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이의 성격은 "교만하고 일처리를 멋대로 한다"라며 삼사의 탄핵 사유가 되었다. 40~50살까지도 과거급제 33인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본인은 갑과 장원을 하겠다고 중복응시.... 이뿐만 아니라 실록을 보면 이이는 어전에서 이황이나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그 제자들이 이이를 역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박시백의 의견이 흥미로운데, 정리하면 이이는 이황이나 조식, 서경덕 등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 그들의 학파가 정립이 된 상황에서 그들의 영향과는 별개의 학술적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말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선배 학자들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과는 필연적으로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이 가족묘 입구

선조 초년에 그는 관직 생활을 하며 <경연일기>를 남겼는데, 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에게 있어서 이황, 이언적[18], 권벌, 이준경, 기대승은 다 비난 대상이었고, 특히 기대승이나 이준경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준경은 자기 스승이 위훈 삭제를 하려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훈 삭제 문제에 대해 매우 강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이이는 이준경의 면전에서 "대신의 말이 애매모호하다."고 말하며 대놓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건 이준경과 이이의 환경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기는 그렇다. 그리고 이준경이 죽으면서 붕당을 경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자, 그 말이 악하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추천하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백인걸 역시 예외없이 비판했다. 백인걸에 대한 인물 평을 요구받은 이이는 한마디로 "기고학황氣高學荒" 이라고 답변했다. 쉽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

가령 이황의 제자였던 김성일과 동석한 어전에서 이이는 "이황의 학문은 좋은데, 자풍이나 정신은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고 발언했다. 이를 들은 김성일은 발끈하여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박하였고, 이황의 또 다른 제자인 류성룡은 이이에 대해 "다 좋은데 뭐든지 따지고 고치려 드는 성품이 흠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서경덕이 죽고 나서는 우의정 추증에 찬성했을지라도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도에 너무 치우쳤다"라고 비판했는데, 조선시대에 멀쩡한 유학자를 도교나 불교에 엮는 것은 대놓고 조롱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이도 한 때 불교 심취한적이 있다. 이렇게 서경덕을 비판한 것은 제자이자 허난설헌과 허균의 부친이기도 한 허엽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20]

특히 이이와 허엽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 사이였는데, 향약의 시행을 두고 허엽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허엽은 이이를 가리켜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판하며 그를 혐오하였으며 이이는 허엽을 평하며 "이론에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에 어둡다"고 비판했다. 또한 허엽의 아들인 허봉은 이이를 탄핵한 '계미삼찬'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허봉은 이이를 탄핵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서 파직당했고 귀양에서 풀려난 직후 병사한다. 결과적으로 붕당 정치의 최종 승리자는 이이와 그의 문파였다.

말년

1581년에 그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이와 더불어 군사훈련 등을 주창했으나,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와 거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은 후술.

이후 탄핵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아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를 지냈다. 그는 1584년에 47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사저(舍邸)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운산에 있는데, 아주 가까운 위치에 그를 배향한 서원인 자운서원이 있어서 지금은 율곡 유적지-라는 형태로 한 동선에서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묘역은 이이과 부인 노씨의 묘 이외에도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이이의 형 이선의 묘, 이이의 장남 이경림의 묘, 장손 이제의 묘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가족묘이다.

평가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과 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이 크게 받듦으로써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졌다. 흔히 이기 일원론이라고 하고 심시기(心是氣),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도 하는데, 퇴계학파에게는 주기론이라고 비판받았다.

학자적인 성취는 이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사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성리학을 주자가 집대성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가 그리했다고 볼 수 있다. 끝까지 '이'와 '심' 중심의 경학적 해석을 제일시했던 이황과 '이통기국'의 기발이승일도설이라는 독창적인 관점으로 이기의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는 해석을 고집했던 이이의 성리학은 '이기론'을 대표하는 입장들이었다. 이후 조선의 모든 붕당은 표면적으로나마 이기론의 해석에 따라 갈렸다.

조선 땅에서 500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성리학은 이렇듯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기론, 18세기 인물성동이론 등의 논의를 거쳐 인간 심성론 쪽으로 치중되어 갔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 심성학으로 변한 것은 이이 등을 필두로 시작된 이 일련의 논의들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을 당사자들이 학문하면서 스스로 밝혔던 바와는 판이하게 각각 성리학이 아닌 율곡학, 퇴계학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중국에선 명나라 대부터 과거 시험에서 양명학 등 다른 학문의 논리임이 분명한 견해도 이치에 맞는 훌륭한 답변이라면 정답으로 간주한 반면,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답이 아니라면 답변자를 사문난적으로 간주하였다. 이이와 이황은 성리학 논의의 방향성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나 말 그대로 '학문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주류 유학이 조선 중기 이후 강한 폐쇄성을 나타내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는 폐단의 책임도 본의는 아닐지언정 일정 정도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